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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유희

기요하라 카즈히로清原和博

기요하라는, 그와 고교시절 콤비를 이루었던 구와타 마스미와 함께 KK콤비로 불리웠다. 평생 고시엔(甲子園/갑자원)의 흙을 밟아보지도 못하는 야구소년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이 야구천재는 1학년 여름 대회-고시엔은 봄대회와 여름대회, 1년에 두번 열린다-부터 고시엔 5회 연속 출전하여, 소속 교인 PL학원을 총 3번의 우승, 2번의 준우승,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4강의 성적으로 이끈다. 그가 3학년 여름 대회 결승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리자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가 '고시엔은 기요하라를 위해 있는 것인가' 라고 커멘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오 사다하루를 넘어설 차세대 주역으로 주목받던 기요하라는 화려한 고교시절을 뒤로하고 프로에 뛰어든다.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를 보며 자란 기요하라의 어릴적부터 꿈은 교진의 유니폼을 입는 것. 평소 기요하라를 뽑을 것 처럼 지대한 관심을 갖고 실제로 스카우트와 어느 정도 이야기도 오갔던 상황에서 교진은,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를 외면한다. 그리고 교진이 자신을 버리고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동료였던, KK콤비의 어나더K, 구와타-그것도 평소 프로 진출이 아닌 와세다 대학 진학을 표명하던-였다.

구와타가 와세다 대학 진학을 표명했던 것, 그리고 드래프트 회의 당일 까지 교진이 기요하라를 선택할 것 처럼 공식적 입장을 취했던 것 모두 '다른 구단이 구와타를 건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구와타는 곧바로 와세다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기요하라는 나머지 6개 구단의 지명을 받고 그 중 추첨을 통해 세이부 라이온즈가 교섭권을 갖는다. 교진에 의해 지명될 것을 확신하고 '뽑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문' 까지 써왔던 기요하라는 눈물을 참으며 '세이부 라이온즈도 좋은 팀입니다' 라고 말한다. (국내 모 야구 전문지 기사에 '교진도, 구와타도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울먹이며 말했다는데, 일본 웹을 뒤져봐도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서 덧붙이지 않았다.) 이 때 그의 어머니가 '나도 오늘부터 교진 팬을 그만둔다. 이제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팬' 이라며 아들을 다독였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비록 프로 입문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그의 야구 실력만큼은 어디 가질 않았다. 기요하라의 프로 데뷔 첫 타석은 사구였으나 두번째 타석(즉, 프로 첫 타수)에 자신의 프로 첫 안타를 기록하는데, 그것이 바로 홈런이었다. 그리고 곧 몇개월이 지나지 않아 세이부 라이온즈의 4번자리를 차지한 기요하라는 고졸신인 최다 타이기록인 31홈런을 (타율 .304 타점 78)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한다.

기요하라가 세이부에 몸담고 있던 세이부 기요하라의 '세이부 시대' 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 시절 세이부 라이온즈는 8번의 리그 우승, 6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기록하는 황금시대를 맞는다.


이후 기요하라는 그 특별한 사연 때문에 안티-교진의 선봉으로 떠오른다. 1987년 올스타전에서는, 센트럴 올스타 선발인 구와타와 KK대결을 펼쳐, 레프트 스탠드에 홈런을 꽂는다. 게다가 장소는 고시엔 구장.

그리고 1987년 교진과의 일본시리즈 6차전, 9회초 투아웃 교진의 마지막 공격. 일본 시리즈 우승(니혼이치日本一)까지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기요하라는 그라운드 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이 그토록 몸담고 싶었던 팀, 바로 저 유니폼을 입고 니혼이치를 이루고 싶었던 팀, 하지만 결정의 순간에 자신을 매몰차게 버렸던 팀... 그런 팀을 바로 최후의 순간, 막다른 곳에 몰아부치고 있는 순간에... 그는 울어버리고 만다. 그는 경기 후에 '교진을 물리쳐, 니혼이치를 이룰 수 있어 기뻤다' 라고 밝힌다.


기요하라는 1996년 FA를 선언한다. 그의 영입에 뛰어든 구단은 한신 타이거스와 교진. 그리고 기요하라의 선택은 역시 교진이었다. 자신을 버렸기에 이를 악물고 싸웠지만, 그만큼 그의 교진 사랑은 깊었던 것. 교진의 나가시마 감독은 '나의 품안으로 뛰어들어와라' 라고 적극적인 애정표시를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교진과 경합을 펼치던 한신의 감독 요시다는 세로 스트라이프를 가로로 바꿔서라도 기요하라를 얻고 싶었다고 할 정도. (한신의 유니폼은 세로 줄, 교진의 유니폼은 가로줄) 13년만에 KK콤비 재회.

하지만 교진의 기요하라는 몇 시즌을 제외하고는 부상과 부진으로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후배에게 4번 타자 자리를 넘겨주고, 2군을 오가기도 하고, 시즌 중 뛴 경기보다 쉰 경기가 더 많기도 하고, 그는 더이상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가 아니었다.

보통 어느 분야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이, 커리어의 정점에서 혹은 그나마 '끝발' 있을때로 '박수칠때 떠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만-그 영광의 시절이 화려하면 화려할 수록, 쇠락의 어둠은 더 짙기 마련이니까-기요하라는 화려하게 기억되는 것 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최고보다 최선이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는, 한 사람의 남자로 남기로 한다. 2005년 그는 요미우리로 부터 시즌 중에 전력외 통보를 받고, 그해말 쫓겨나듯 오릭스로 이적한다.


언제부턴가 기요하라의 별명은 두목番長. 순수하고 정열적이고 정 많은 늙은 노장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 더 이상 일본 프로야구를 뒤집을, 국가적 관심을 한몸에 받는 수퍼 스타는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굵은 땀방울을 매일 같이 쏟아내는 가장 멋진 중년 남자로 손색이 없다.

기요하라는 그 화려하고 오랜 선수생활 탓에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다. 아래에 몇개를 모아놓았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사사키의 은퇴 경기.

▶1993년 롯데의 이라부 히데키는 158km의 일본 최고속의 직구를 기록한다. 158km는 이후 2002년 야마구치(오릭스), 2004년 이가라시(야쿠르트) 가 기록했고, 2005년 크룬(요코하마)가 159km를 기록하기 전까지 최고 구속으로 남아있던 기록이다. (크룬은 그해 곧 161km로 일본 최고속을 갱신했다.) 기요하라는 이 158km의 공을 건드려 파울로 쳐내고, 곧바로 이어진 156km 짜리 직구를 통타해서 2루타를 기록한다.

▶기요하라는 2002년 일본시리즈에서 친정(?)팀 세이부를 맞이하여, 리그 최고의 투수 마쓰자카를 상대로 1차전 150m 홈런, 4차전 2루타 등으로 거인의 4연승 스트레이트 우승에 일조한다.

▶2005년 시즌 중에는 요코하마의 대마신 사사키佐々木主浩의 은퇴 시합의 마지막 타자로 지명되어 타석에 선다. 일본을 대표하던 마무리 투수, '사상 최강의 스토퍼'의 은퇴 경기, 그의 야구 인생 마지막이 될 한구 한구에 대해 기요하라는, 분명히 볼인 투구에 대해서도 전구 풀스윙으로 정면 승부한다. 사사키의 마지막 포크볼에 전력 풀스윙으로 쓰러진 기요하라는 후에 '마지막에 세계 제일의 포크가 왔다'고 커멘트. 자신이 지명된 것에 대해 감동하여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눈물이 글성글성했다는 후문.

▶2005년 4월 21일 한신의 수퍼 마무리 후지카와가 교진이 2-10으로 크게 뒤진 2사 만루, 볼카운트 2-3에서 포크를 던져, 헛스윙 삼진을 당한 기요하라는 후지카와를 비겁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2개월 후 다시 만난 후지카와에게 직구로 삼진을 당하고 완패를 인정. 이후 후지카와를 '전력으로 상대하고 싶은 선수들' 중 하나로 등록, 종종 언급한다. 그리고 곧 이어 그해 올스타전에서 후지카와를 다시 만나 전구 직구로 삼진 아웃.

▶2006년 니혼햄의 다르빗슈에게 사구를 맞아 병원으로 가면서 '경기장에 관전을 온 장남이 울음을 참는 것을 보고, 지켜야할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그 녀석(위협적인 사구를 던지는 투수)을 넘어뜨리겠다' 라고 말해 구설수에 오른다. 프로레슬링으로의 전향을 권유한 사람도 있다고.

▶공격적인 투구를 하는 한신의 야부가 다수의 사구를 기요하라에게 맞춘 후에, '일류 타자라면 저 정도의 볼은 피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커멘트. 또한 야부가 시즌 3개째 사구를 준 것에 대해 기요하라가 타석에서 손가락 3개를 펴보이자, '연봉 3억을 받고 있다는 의미겠지' 라고 커멘트. (의외로 유머감각이 있는데...)

▶문신을 하려다 어머니께 꾸중을 듣고 단념한 기요하라는 문신 대신에 부인의 권유로 피어스를 하기 시작했는데, 거인 최초의 피어스 착용 선수는 조성민.

▶비디오 게임 패미스타 시리즈의 첫 작품부터 지금까지 개근하고 있는 유일한 야구선수. 또한 거의 모든 야구 게임에 그 이름을 올려, 역대 프로야구 선수의 비디오게임 출장 기록을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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