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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유희/일본문화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1980년대는 변화의 시대였다. 오일쇼크 이후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가 퍼져나갔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미-소의 냉전은 심화되었으며, 존레논이 죽었고. MTV가 첫 전파를 쏘았다. 일본에서는 패미컴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마크로스가 방영되었다.



1982년 TV시리즈로 첫 선을 보인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히카루는 이전까지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지구를 지키는 단 한명의 히어로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뛰어난 조종능력을 가지고, 작품 마지막까지 생존하긴 하지만, 거대한 군대 조직을 이루는 한명의 병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 맺어지지 않는 다는 것도 10대 초반이 가지고 있는 애니메이션 세계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주인공측(?) 메인 메카-발키리가 구식 범용 전투병기 형태인 '파이터'의 모습을 가지는 것도 이전까지의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발키리가, 현재의 전투기들과 다름없이, 그저 수많은 '타고 싸울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캐릭터 작화는 관능적인 터치를 가지고 있고, 젠트라디의 함선 디자인 역시 그러한 느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마크로스가 기억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린·민메이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 갈등의 축을 이루는 두 외계 종족, 지구인에 비해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젠트라디와 멜트라디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문화culture란 것을 잃어갔고, 반대로 바로 그것이 연약한(?) 우리 지구인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었다. 남성들만의 종족 젠트라디와 여성들만의 종족 멜트라디, 그리고 그 사이에 말려든 마크로스 간의 전쟁을 끝내는 최종 무기는 바로 민메이 어택, 그녀뿐이었다.
특히 극장판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검은 우주 한복판을 하얗게 수놓는 함포와 미사일들의 향연을 뒤로 하며 오버랩되는 민메이의 공연은,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온 화면으로 뿜어내는 한편의 뮤직비디오였다. 민메이 어택은 젠트라디와 멜트라디 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람하는 수많은 소년들에게도 culture shock라는 이름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실 마크로스 열풍의 대부분은 민메이 어택 덕분이었고, 국내에서도 각종 화보집과 설정집, 소설이 절찬 판매되었다.


사실 나는 마크로스의 팬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몇가지 이유로, 특히 히카루와 민메이의 러브라인이 생성되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작품에 몰입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나이였다. 결국 나에게 80년대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은 기동전사 Z건담뿐이었다.

그러다 6년전쯤이던가. 슈퍼로봇대전 알파forDC에서 바로 이 민메이 어택의 에피소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 나름대로 나에게 culture shock였다. 거대한 검은 맵 타일 양쪽으로 대립한 론드=벨과 젠트라디. 그리고 갑자기 입력disable 상태에서 흐르는 민메이의 목소리. 치열한 전장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정지한채, 민메이의 목소리 외는 끝없는 침묵. 나는 커서 입력이 가능해진 후에도. 한동안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의 80년대, I love you so-